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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 05 / 26 / 023]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신작 '버닝'을 봤습니다. 이 영화는 솔직시 한 번의 감상으로 쉽사리 감상문을 적기가 조심스러운 작품이네요. 어떻게 보면 나홍진 감독의 '곡성'을 능가하는 많은 복선과 떡밥으로 관객들을 현혹하고 농락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만큼 보는 사람에 따라 많은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얘깃거리가 많은 작품은 언제나 흥미롭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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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야기 자체로만 본다면 단순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종수(유아인)는 어느 날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 해미(전종서)를 만납니다. 둘은 쉽게 친해지고 어느 날 해미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면서 종수에게 집과 고양이를 맡깁니다. 그리고 해미가 여행을 간 동안 밥도 주고 응가도 잘 치워주죠. 그런데 한 번도 보지는 못 합니다. 그리고 해미가 돌아오죠.


돌아온 해미 곁에는 벤(스티븐 연)이라는 자유분방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돈 많고 하고 싶은거 하면서 사는 그런 청년이죠. 해미는 이 때부터 벤과 붙어 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벤이 자신의 취미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 즈음해서 해미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종수는 벤을 의심하기 시작하죠.


결과적으로 의심을 확정이라고 여긴 종수는 벤을 죽입니다. 그리고 모든 걸 불태워버리죠. 사실 이런 이야기만 들어보면 이 영화는 질투와 복수에 눈이 먼 한 사내가 친구 많고 돈 많은 (금수저인지 은수저인지 그건 명확히 모르지만) 한 대상에게 복수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 정도만 들여다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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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화 속에는 굉장히 많은 장치들이 숨어져 있습니다. 초반 해미가 종수와 술을 마시며 얘기했던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누구나 벤이 해미를 죽이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장치들 그리고 종수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소설이라는 점 등을 보면 이 영화는 기본적이 이야기 구조가 단순히 드러나 있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줍니다.


중에서도 가장 이 작품에서 크게 작용하는 부분은 해미가 판토마임을 하면서 들려주는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는'에 대한 부분일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이 이야기에 해당되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죠. 첫 번째로 해미의 고양이. 사실 벤의 집에서 도망간 고양이를 찾을 때 종수가 "보일아~" 불러서 왔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 고양이가 실제로 해미의 고양이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부분은 영화의 큰 줄거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벤이 해미를 죽였다고 생각하게 되는 결정적인 증거 (종수 스스로 생각하는)가 되기 때문이죠. 단순히 흔한 고양이의 반응으로 치부될 수도 있는 부분이고 실제로 해미가 키우던 보일이 맞을 수도 있지만 그 어떤 확고한 단서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없다는 것에 대한 망각' 외에 조금은 반대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일시적인 존재하는 ' 대한 부분입니다. 영화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남산타워의 거울에 반사된 빛이 해미의 집에 잠시나마 들어오는 부분인데 종수가 햇빛을 처음 시기는 해미와 섹스를 했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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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후로 종수는 고양이 보일의 밥을 챙겨주러 때마다 해미의 집에 비치는 반사광을 보며 자위를 하죠. 이러한 장면이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연속적으로 보여진다는 것은 그가 일부러 시간에 맞춰서 해미의 집을 온다고 있을 같습니다. 그리고 시간에 자위를 하는 것은 결국 해미와의 섹스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찌보면 엄마도 없고 아빠도 구속되어 있는 상태에서 유일하게 먼저 말을 걸어주고 살결을 느낄 있었던 해미의 존재는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때문에 이후 그녀가 살해당했다는 의심을 하고 의심을 확정으로 바꾸고 나서 별로 고민하는 장면 없이 벤을 죽이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사랑이나 애정의 관계 이상의 존재였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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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두 번째로는 해미라는 인물 그 자체입니다. 과연 해미는 진짜로 죽은 것일까? 라는 의문을 관객들은 가지지 않을 수가 없죠. 벤이 취미라고 말한 비닐하우스 태우기와 벤의 집에서 나온 해미의 물건들. 사실 이 정도를 가지고 벤이 해미를 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종수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생각하게끔 만들고 있죠. 영화 스스로 확실히 보여준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관객들은 영화 속 미끼를 거침없이 물어댑니다.


게다가 심지어 종수라는 인물은 자신의 꿈이 소설가라고 하면서 종종 글을 쓰는 모습도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이야기 자체가 종수의 소설이 아닐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이 영화는 게임으로 치면 분기점이 굉장히 많은 멀티 엔딩의 구성을 지닌 게임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그게 정답이 되는 영화인 것이죠. 이런 영화를 보고 누군가가 답을 확정짓고 내린다면 그것도 이상한 결론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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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수와 해미 그리고 벤을 둘러싼 이야기 외에도 종수의 주변 이야기는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골집으로 내려온 후부터 얘기를 하지 않으면서 계속 전화를 하는 엄마와 관련된 이야기와 사고를 치고 재판을 받고 있는 아빠에 대한 이야기이죠.


이야기 모두 이야기의 시작 시점에서는 ' 이런 이야기를 넣었나?'라는 생각이 드는 이야기였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 넣어야 했는가?' 대한 대답을 느낄 있습니다. 그리고 곁가지는 종수가 그토록 해미에게 집착해서 살인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이 되기도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모와 관련된 이야기는 종수라는 인물이 '사랑' 받고 자라지 했다는 것을 거의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고를 치고 재판을 받는 아빠는 본인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결국 선처를 구하지 않고 실형을 선고 받게 되었죠. 과거에도 본인의 자존심을 내세우다가 집을 말아먹은 수준으로 떨어트렸음에도 불구하구요.


그리고 엄마라는 인물은 아들을 보자마자 한다는 애기가 달라는 얘기입니다. 밥은 먹는지 살고 있는지 그런 것들은 전혀 물어보지 않아요. 물어본다고 하더라도 속된 말로 영혼이 실려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와중에 종수는 엄마가 요구한 돈을 주겠다고 합니다. 물론 역시 영혼은 실려있지 않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을 뿐이지만요.


이런 환경에서 자라온 종수이기에 그를 안아준 해미라는 존재가 각별하게 새겨졌을 가능성이 크죠. 그리고 그러한 감정으로 인해 벤이 해미를 죽였는지 죽이지 않았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벤을 살해하고 맙니다. 영화는 지독하게 종수라는 인물의 상황과 행동에 집중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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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합니다. 유아인은 언제나 그렇듯 캐릭터에 빠져드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고 스티븐 연이라는 배우는 여러모로 귀티나는 마스크를 가지고 귀티나는 캐릭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약간 어눌한 한국어 발음은 캐릭터를 살려주는데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구요.


무엇보다 눈여겨 밖에 없는 배우는 전종서라는 신인입니다. 과연 신인이 맞는가? 라는 생각이 정도로 중에서 밀리지 않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오히려 능가하는 연기를 보여줄 때도 있습니다. 개성있는 마스크에서 나오는 배우로서의 느낌이 나쁘지 않은 신인이었다고 생각되더군요.


연기를 하는 배우들의 연기를 스크린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적 재미는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영화 자체의 재미를 따지자면 생각해야 부분이 많은 작품이지만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감상해 보셔도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창동 감독님 작품 중에서는 그래도 친절한 작품에 속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머리 아픈 작품도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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